정혜경,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인용2019. 11. 21. 00:11소설 형식의 시국선언과 기억의 윤리 - 공지영의 ⌜도가니⌟론
정혜경 비평집, <백수들의 위험한 수다> 中
비평 요약정리
1.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알레고리
소설에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인하학교의 청각장애아들의 고통이, 현실에선 비정규직의 설움, 용산참사, 이명박 정권의 강압적인 태도로 인한 생명과 인권의 박탈이 시대의 알레고리를 만들고 있다. ‘도가니’는 인터넷에 연재될 때부터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누적 조회수 1,100만을 넘는 가운데 연재물에 달린 댓글에서부터 단행본 출간 후에 올라온 온라인서점 독자평이나 블로그 서평, 그리고 영화 개봉 이후 사건 재조사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이르기까지 ‘도가니’의 감상 결과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였다. ‘분노’는 곧 ‘공감’의 형식이며, ‘공감’은 ‘소통’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2.광란의 도가니 : 농아들의 비명과 말할 수 있는 자들의 침묵
청각장애아 두 명의 의문사와 ‘유리, 연두, 민수’ 등에게 가해진 성폭력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침묵의 카르텔”, 혹은 은폐된 권력의 잔인한 네트워크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기득권층의 교묘하고 잔인한 네트워크는 작가의 입담과 에피소드 배치의 묘미가 결합해 속도감을 내면서 폭로된다. 자기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거짓 증언하는 동료 교사, 좀처럼 수사를 시작하지 않는 담당 형사, 서로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책임을 떠넘기는 교육청과 시청, 지연으로 유착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중 진술서를 쓴 산부인과 의사, 전관예우를 통해 공소 사건을 해결하려는 변호사, 성폭행 사실이 입증됐는데도 교장 형제의 과거 공적이라는 것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는 판사 등 그들의 위선은 공판을 전후로 하여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3.시련의 도가니 : 초월의 욕망과 소시민적 절망
“미친......광란의 도가니”에서 ‘도가니’라는 어휘는 일차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광란’은 곧 ‘시련’이고 ‘시련’은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한 단련이다. 그리고 강인호와 서유진이라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중심으로 ‘시련의 도가니’ 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서유진의 말에서 “그 너머의 무엇”이라고 언급되는 ‘초월의 욕망’이 내포된다. 이것은 속물적인 일상을 뛰어넘는, 생존 이상의 것, 이른바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욕망이며 신 없는 신학이라 불리는 ‘숭고’와 관련된 것이다. 독자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분노의 감정 역시 평소에 발현될 수 없었던 숭고의 체험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한편, 강인호는 그간 희망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생존과 타협의 원리에 강하게 사로잡혀 이제 그만 생활인으로 돌아오라는 아내의 경고 속에서 서유진의 긴급한 문자메시지를 외면하고 마는 소시민적 절망에 빠져든다.
4.‘도가니-되기’를 향하여 :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의 윤리
기억한다는 것은 당장의 실천력에서 보면 매우 미약하거나 무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촛불을 경험한 우리에게, 또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작가 공지영에게 ‘잊지 않겠다’는 강한 부정은 윤리를 구성하면서 하나의 실천적 행위가 된다. 그리하여 공지영의 ⌜도가니⌟는 이 쿨한 척하는 사회를 가로지르며 뜨거워지고 싶어 하는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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