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책2019. 11. 22. 15:18기록, 허상과 실상의 경계
알츠하이머에 걸린 김병수는 의사로부터 하나의 조언을 얻는다. “뭐든지 기록하고 그 기록을 몸에 지니세요.” 기록, 알츠하이머에 걸린 김병수의 생존법이자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렸던 작가의 서술방식이었다. 김병수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일들을 기록한다. 또한 과거의 일들도 기록하고, 앞으로의 할 일인 ‘미래 기억’들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하지만 김병수가 기록을 하면 할수록 허상과 실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끝내 모든 것은 실상을 배경으로 한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무(無)로 돌아간 김병수의 최후는 고독하고 절망스럽기 짝이 없다.
이 책은 연쇄살인범 김병수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보통 독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바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의 말을 모두 진실로써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1인칭 시점 서술방식이 독자들로 하여금 반전인 결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수 있었고 하나의 덫과 같은 장치로써 소설에 작용한 것이었다. ‘살인자의 기억법’,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억은 늘 왜곡되고 변형된다. 기억에 의존해서 쓴 기록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 기록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이 쓴 기록이라면 사실에서 더욱더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반전을 노리고 쓴 계획적인 서술방식임이 틀림없다. 작가는 반전을 통해 독자들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리고 싶어 했다.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에 몰입된 독자들은 김병수와 박주태의 대결을 상상한다. 그러한 기대를 갖게 된 배경 역시 김병수의 ‘기록’을 사실로 인지하고 읽어 내렸기 때문이다. 결말에 와서 비로소 뒤통수를 맞은 독자들이었다. 작가는 이 책을 그저 잘 읽어버린 독자들을 꾸짖는다. 그제야 아차 싶은 독자들은 되돌아가서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독자들의 뒤로 가기는 김병수가 일지를 쓰며 복기했던 행위와 비슷하다. 독자는 되돌아가서 다시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 읽은 것인지 무엇을 빠뜨리고 읽은 것인지를 복기한다. 작가는 독자들이 그저 이 책을 한 번 읽히고 말아버리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곱씹어 읽으면 읽을수록 수상하고 이상한 근거들을 찾아낼 수 있는 재미를 독자들에게 부여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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