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 <항구의 사랑>

2019. 9. 21. 23:11

'책끝을 접다' 영업으로 정말정말 오랫동안 대출하려고 기다리던 책이었다. 학교 개강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대출했다. 또 누군가가 먼저 빌리기전에 선수쳤다. 나는 승리했고 결국 깃발을 잡았다.

하지만 너무 기대한 탓일까..? '책끝을 접다'에서 보여준 살랑살랑하고 말랑말랑한 로맨스 서사는 몽땅 빠져버리고 현실적이고 비극적인 내용만이 씁쓸한 맛을 입에 돌게 했다. '그 시절 우리들이 사랑했던 소녀들'이라는 달콤한 문장으로 어떻게 이렇게 후드려팰 수가 있을까.. 굳이 이렇게 처절해야해?! 싶은 억하심정도 있었지만 최은영의 <무해한 사람>만 보아도 한국소설이 보여주는 현실은 지극히 현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우리는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거슬려하고 이상하다고 여겨야한다. 그래야 마음 깊은 곳 불편한 급소를 팍 찌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사실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은 굳이 이렇게 까지 했어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던 그 시절에 대하여 추억을 느끼고 어떤 작은 염증을 느끼지만 과거에 머물러있으면서 현실을 보지 못하는 인희는 너무도 안타까웠다. 인희의 수동적이고 보수적인(나아간다는 의미에서 진보와는 반대인) 태도는 탄식을 자아냈다. 다른 친구들은 대학생활을 하고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러는데 인희는 끊임없이 '나'에게 그때 그 시절에 대하여 회상하고 돌아가고 싶어하는 회귀의 태도를 보이면서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물론 이 소설의 아주 큰 장점은 '그때 그랬지'라는 공감의 버튼이다. 그 버튼을 누른 순간 우리들은 모두 그때 그 시절로 빠져든다. 팬픽을 읽으며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사춘기 소녀에게 이성보다 더 예민한 감각을 만져주는 동성에게 끌리던 그 시절. 그 시절을 회상시켜주는 아주 좋은 콘텐츠로서 이 작품은 자리잡은 것이다. 마치 90년대를 불러주는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말이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으로 내버려두었을때의 일이다. 인희가 끊임없이 나와는 반대로 현실속에 개입하면서 같은 말들을 반복할 때 대체 인희는 왜 같은말만하는 앵무새가 되었냐 이말이다. 작가는 인희의 끊임없는 등장을 통해서 도대체 뭘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들의 그 시절은 이미 끝난지 오래고 더이상 추억을 맛보면 안된다는 일종의 경고일까. 너희는 이렇게 인희처럼 살지말라는 따끔한 충고였을까.

정말 뻔하지만 나라면 후에 이십대가 된 '나'와 민선선배와의 재회를 그리는게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맨 처음부터 개설한 시나리오대로 우리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땐 그랬지라는 공감의 버튼을 한번더 자극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광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책끝을 접다'가 기대감은 하늘 높이 띄우고 바닥으로 내리꽂아버리는 잔인함이 말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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