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흰>
책2019. 11. 20. 20:47p.16
얼룩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 낫겠지.
p.19
피냄새가 떠도는 침묵속에서. 하얀 강보를 몸과 몸사이에 두고.
p.26
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 그 기억들과 분리해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
p.31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p.40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고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을 건넬게.
더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p.59
삶은 누구에게나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어머니가 낳은 '나'의 또다른 형제의 죽음. 한강이 써내려가는 또다른 죽음에 대한 묘사였다. 빛을 보자마자 죽어버린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서글픔이 별다른 묘사없이도 인물의 대사로 선명하게 인상이 남았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전의 일이었다. 내겐 이름모를 윗 형제가 있었다. 타이밍의 기막힌 천운으로 그 윗 형제는 죽고 내가 들어섰다. 만약 어머니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곤 한다. 흘러가는 강물에 그렇게 자연사하지 않았을까. 아니, 아예 탄생조차 하지 않는 세포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는 이것이 마냥 천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정말 누구에게나 호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불친절하면 불친절했지 특별히 친절하지 않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성장과정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문을 열고 또다른 문을 통과하고. 늙기 위해서 자라난다는 말처럼.
충격적인 사건을 접했을때 나는 마냥 죽고싶었다. 처음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불신을 느꼈었다. 지금에서야 어느정도 회복이 되었지만 그때 만큼 괴로운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탄생이 마냥 천운으로 포장될 수 있다는 말인가. 죽고싶었던 과거의 나에게는 그 윗 형제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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