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중국식 룰렛>

2019. 11. 20. 20:37

p.53
우리에게 주어진 불운의 총량은 어차피 수정될 수 없는 것이니까.
죽음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천사의 몫도 있을 것이다.

p.57
알고있는지. 나의 모든 것은 거짓이다. 진실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

p.58
운명이란 비정하고 무자비하지만 늘 전령을 먼저 보내 경고를 할 만큼은 용의주도하다고 어릴때부터 나는 종종 생각해왔다.

p.60
사라져버린 내 과거의 한 시절을 관람하는 투어버스에 올라탄 기분이다.

p.61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허무를 향해 한없이 수렴해가는 단순함의 군무같은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p.62
진심은 대개 이유가 없고 단순한 것 아닌가

p.63
이 밤 나는 난로와 함께 뜨겁게 앓으며 그 위에서 끓는 주전자처럼 흐느낄 것이다.

p.67-68
부모의 이른 죽음은 소년을 조숙하게 이끄는 한편 일생을 내부의 뭔가가 작동이 멈춰버린 느낌속에서 살도록 만든다.
모든게 제자리를 잡으면서 동시에 정해진 궤도안에서 끊임없이 공전하는 느낌이다.

p.83
내년이면 너도 중학생이다.
그것은 끝나가는 유년에 대한 유감이라기보다는 책임감과 시간을 학습시키는 구태의연한 교육방식이었다.

p.91
그 혼란은 슬픔보다는 고독의 얼굴로 다가왔다.

p.92
메뉴얼대로 사는 사람이 갖기 마련인 정돈됨 때문에 어딘가 규격품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p.97
세상의 선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은 만큼 철이 들었던 건지도 몰랐다.

p.98
충격 완충장치 같은거지. 우린 안전하게 사는 법만 배웠잖아. 벗어나면 겁먹게 돼있어. 넌 안그래?

p.102
소년은 그와 단짝이 됨으로써 자신이 쉽게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는 기만의 회로에 대해서도 깨치게 되었다. 자신은 밝은 조명 옆에 생겨나기 마련인 어둠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꼬마전구였다. 조명이 꺼졌을때 대용품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밝히지는 못하는 존재였다.

p.105
그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의 가장 오래된 대용품이라고 말하려했다. 그래서 자신의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거라고.

p.106
잘못 어른이 돼버린 사람에게도 아주 가끔 어린시절의 짧은 꿈과 해후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그것은 생의 찬란한 진품을 되찾는 순간이며, 그때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고 불꽃의 그림자가 강물에 어리면서 진짜 축제가 시작되는거라고. 그 축제에는 오랜 세월 그토록 멀어지려했던 사람이 찾아와 이렇게 말해줄지도 모른다. 네 잘못이 아니야.

p.107
그러는 동안에도 그의 차는 언제나 앞뒤의 차와 일정한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도망다는 사람같았다.

p.133
어차피 생은 절취선처럼 불연속적으로 이어졌다가 약간 위태로운 절단면에 이르러 끊어져버리는 것이니까.

가장 가까운 일상의 조각들이 만난다면 이러한 이야기가 탄생하구나. 느꼈다. 어떻게 보면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물건들을 엮으면 사소하지만 세심한 이야기가 탄생된다. '중국식 룰렛'이라는 말은 참으로 호기심을 이끌어내기엔 더없이 좋은 말이다. 이 소설집은 삶과 죽음을 단 한 끝차이로 엮어준 소설집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죽음에 가깝다 이 말을 나는 소설을 다 읽고난 다음에 알게되었다.

 

'러시안 룰렛'이라는 말은 유명하다. 룰렛, 생각해보면 불명확한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총을 쏴서 총알이 들어있으면 그 사람은 죽음에 이른다. 운좋게 총알이 없는 기회였다면 산다. 삶은 이렇듯 룰렛을 닮아있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하여 이유는 없다. 삶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내가 어느날 길을 걷다가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초등학교 동창을 만날 수도 있다. 삶은 기승전결이 없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생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로 구연하면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같은 시간을 살아가니까. 생계를 위해서 회사를 다니고, 학벌을 위해서 대학을 다니고. 반복적이고 무료한 나날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쳇바퀴같은 삶은 언제나 불명확하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근거는 죽음에 있다.

 

잘먹고 잘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죽기도 한다. 그것은 우연에 의한 사고사일 수도 있고, 마음의 병이 쌓여 충동적으로 선택한 자발적 죽음일수도 있다. 모두들 의학기술의 발달로 100세 시대로 말한다. 하지만 아무런 사건도 없이 일정한 직선으로 삶이 유지되는가 생각해보면 그것또한 절대 아니다. 우연은 너무도 예상치 못할때 일어난다. 그래서 우연에 의하여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고통을 준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 그래서 남겨진 자들은 더없이 고통받는다. 살아생전 죽은자와의 추억때문에. 기억의 영속성때문에 남겨진 자들은 끊임없이 고통의 쳇바퀴를 두통처럼 달고산다. 사진은 그 고통을 더욱더 심화시킨다. 기억을 상기시키고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애도는 확실히 죽은자보다 남겨진 자들을 위한 작별인사다. 애도하지 않은 남겨진 자들은 끝없이 과거속을 유랑한다. 돌아가고 싶어하는, 회귀의 성질 때문에. 그리고 결국 또다른 죽음이라는 충동적이고 절망적인 선택을 한다. 참 슬픈일이다.

 

살아있음이 얼마나 죄스러울까. 죽은자를 기억하지는 못할 망정 잊으려고 애를 쓰다니. 고작 나하나 살겠다고.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주문처럼 '이제 그만하라'고 외친다. 과연 이 죽음이 본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면 그런 말이 나올까. 남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없다. 아무리 동정을 느낀다고 한들, 그것이 타인과 경계선을 긋고 멀리 떨어진 풍경인데 내 일같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유품을 정리하는 일은 어쩌면 필수불가결한 일 인지도 모른다. 유품을 가지고 있는 것. 추억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쳇바퀴같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은자가 살고있는 하늘로 불태우는 것은 남겨진 자들이 살기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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