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은어낚시통신>

2019. 11. 20. 21:44

p.83
바람은 몹시 차가웠지만 거대한 보름달이 코발트빛 바다 위에 비행접시처럼 조용히 흔들리며 떠있었다.

p.89
그후로 몇달 그녀를 더 만나면서 그녀와 나느 으레 돈가스나 비프스테이크로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그리고 요령부득인 상태가 되어 여관에 들어가 메마른 섹스에 열중했다. 그러니까 이런식이었다. 돈가스, 맥주, 섹스. 비프스테이크, 맥주, 섹스. 돈가스, 맥주, 섹스 …… 섹스에 미친 것이 아니라 웬일인지 무인도에 유배된 사람들처럼 다른 할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p.90
"사막에서 사는 사람"
"상처에 중독된 사람"
"감정에 나약한 척하면서 사실은 무모하고 비정한 사람, 터미네이터"
"무서운 사람"

지향성, 익숙한 생()의 집으로 나아가 회귀하다

나와 그녀, 모임의 사람들은 삶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이었다. p.57 ‘예술사진으로 별빛을 보지 못한 후 나는 광고사진을 몇 년 하다가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임시고용 기자직이었다.’ p.58 ‘대학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몇몇 시시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지만 그다지 빛을 본 배우는 아니었다. 광고모델을 시작한 건 순전히 생활비 때문이었다.’ p.73 ‘그들은 모두가 삶으로부터 거부된 사람들이었어요. 삶에 제대로 뿌리박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현실적인 삶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는 살아지지 않으니까.’ 소외당한 사람들은 소외라는 동질감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안아준다. 동질감으로 연결된 소통 이전의 삶은 건조한 사막이며 존재의 외곽으로 밀려난 삶이었다. 그렇게 현실적이고 안정된 삶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삶으로부터 거부된 사람들은 언제나 외로웠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만의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나아갔다. 나아가는 지향성의 힘으로, 19647월 생()이라는 집단의 집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익숙하고 안정적인 19647월 생()으로 회귀하며 더 이상 억압받지도, 공격받지도, 상처받지도 않으면서 점차 서로를 회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귀소성을 가진 은어처럼 그들의 존재성을 인정받는 장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p.80 ‘아침이 오기까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내 살아온 서른 해를 가만가만 벗어던지며, 내가 원래 존재했던 장소로, 지느러미를 끌고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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