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책2019. 11. 22. 19:08고통 속을 마냥 걸었다.
김연수,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
마음이 울적하고 힘들 때는 마냥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머릿속에 뭉쳐있는 잡념들을 그저 흘려보내고 말면 지끈거리는 두통이 사라져버린다. 걷지 않고 나만의 방 안에 옹송그리고만 있으면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계속 든다. 그래서 서지희씨가 어떤 마음으로 저녁이면 마냥 걷고 싶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런 일(p.117)’을 겪고 나서 그녀는 ‘그 길을 그렇게 계속 걸었(p.118)’다. 걷는 일 말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무려 10년 동안 ‘가정(假定)의 지옥(p.117)’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꾸만 만약이라는 가정이 그녀를 무너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겪은 ‘그런 일(p.117)’은 사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고(p.112)’였다. 그래서 그녀는 10년 동안 고통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이 소설은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교수가 ‘유가족들은 잘못한 게 없느냐(p.112)’고 말하는 부분에서 잊고 있었던 ‘그런 일(p.117)’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가족들은 그저 왜 내 아이가 죽었는지 진상규명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언론과 사람들은 유가족들의 잘잘못을 따지고 있었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p.112)’에게 돈을 받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다, ‘정치 세력을 등에 업은 유가족(p.112)’이라며 손가락질을 한다. 픽션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무려 4년 전만 해도 언론에서 떠들어대던 내용이었다.
떠난 자를 보낸 남아있는 자의 질문은 ‘너는 죽었는데 왜 나는 살아 있는가?(p.117)’이다. ‘한번 헤어지고 나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p.118)’ 생과 사의 경계는 잔인할 정도로 명확했다. 아무리 걷고 걸어도 닿지 않는 그 경계를 서지희씨는 마냥 걸었다.
관광지에서 ‘하하하 호호호 서로 농담하고 웃는 관광객들(p.118)’ 사이로 그녀가 ‘우는 걸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p.118)’ 없었다. ‘그런 일(p.117)’이 이미 10년이나 지나버려서일까, 아니면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이유 때문일까.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울고 싶으면 마음껏 우셔도 됩니다(p.118)’ 그녀의 고통을 기억하고 아파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 날 하루 종일 자극적인 언론보도를 내면서 그들의 고통에 반짝 이슈처럼 다루다가 다시 1년이 지났을 때 그들을 추모해주고 기억해주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에 무정한 사람들이기에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의 고통에 호소해주는 이는 적었다. 마지막에 그녀가 ‘여기에서는 얼마든지 걸어도 좋으니까요(p.118)’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가슴이 찢어졌다. 가족을 잃어버린 그 장소에서, 대조적으로 행복한 사람들 틈에서 가장 불행하게 홀로 울음을 터트리는 일이 얼마나 비참할까. 그 말을 담담하게 내뱉어내기까지 얼마나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을까.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을 외치기까지 얼마나 슬픔의 시간을 견뎌냈을까. 그래도 마지막에 서지희씨가 ‘우리도 이제 걸어볼까요?(P.119)’라고 말하면서 유가족들이 칠흑같이 캄캄한 ‘저녁이면 마냥 걸었다’면 ‘우리도 이제 함께 걸으면서(p.119)’ 그 길을 다 같이 견디며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의 불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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