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우드 앤더슨, <달걀>

2019. 11. 22. 19:06

진짜 괴물은 누구인 것일까?

셔우드 앤더슨, <달걀>

 

셔우스 앤더슨의 <달걀>은 제목부터 예측 불가능했다. 소설을 읽기 전부터 <달걀>이라는 제목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접하는, 먹을 수 있는 식용으로써의 달걀과 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생명으로써의 달걀이었다. 그래서 오직 달걀에 초점이 맞춰진 이야기를 상상했으나 막상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등장한 것은 달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의 성장과정 속 달걀 에피소드였다.

의 부모님은 출세를 위해서 두 사업을 시작했는데 하나는 양계장 사업이었고, 또 하나는 요식업이었다. 첫 번째 양계장 사업에서 는 으스러져 죽은 병아리들에 대하여 일종의 신처럼 말한다. 병아리를 멍청하다고 말하고 문헌에 현혹되지도 믿지도 마라라고 말하는 부분이 신의 목소리를 차용하여 경고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양계장 사업에서 닭이 되지 못한 병아리들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데 그 비용에 대한 나의 계산법은 자본주의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계장 사업을 실패하였음에도 의 아버지가 보물처럼 가져온 기형아들은 소름이 끼쳤다. 그것을 작은 괴물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 괴물은 의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로테스크한 것들은 값진 것이라고 하는 의 아버지가 자본주의의 괴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출세하기 위한 욕망이 때론 이성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행동하는 것 같다. 바로 두 번째 요식업에서 의 아버지는 식당에 오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는 것처럼 말이다. ‘의 아버지는 그토록 기다리던 젊은 손님에게 달걀을 한쪽 끝으로 세우고, 기형 닭이 담긴 병들을 보여주고, 달걀을 병목에 집어넣으려고 노력하다가 끝내 달걀이 깨져 달걀을 집어던지고 만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사업 실패로 인하여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실패를 보상받고 싶은 욕구는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하려고 아등바등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실패에 또다시 다다르자 아버지는 끝내 젊은 손님을 향해 달걀을 던지면서 분노에 찬 진짜 괴물이 되고 만다. 모든 것을 망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절망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데 그 대화는 어쩌면 출세에 대한 욕망을 버리자는 단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린 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을 달걀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달걀에 대한 의문을 끝내면서 이야기가 끝나고 만다. 마지막에 달걀이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승리했다고 말하는데 그 심오한 의미에 대하여 예측해보자면 의 아버지 마음속에서 자본주의 괴물이 끝내 승리한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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