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손톱>
책2019. 11. 22. 18:59슬픈 자화상
권여선, <손톱>
소희의 엄마와 언니가 사라지기 전에는 소희에게 ‘희망’이 있었다. 반지하도 아닌 방 두 개짜리로 이사 가서 고양이도 키우는 아주 작은 ‘희망’이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튼튼하게 소희를 지켜줄 것 같았던 ‘가족’은 각자의 삶에 치어 서로를 배신하고 도망쳐버렸다. 그때부터 소희는 희망을 잃어버렸고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이득이고 얼마가 손해인지 아주 사소하고 자잘한 것들까지. ‘희망’을 잃어버린 소희에게 ‘현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소희의 계산은 곧 현실이며 삶을 이어나가는 생존방식이었다. 소희의 계산이 조금이라도 틀어지게 되면 빚덩이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서 소희를 덮칠 것이다. 늘 고통을 축적시키며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소희가 의도치 않게 아물지 않은 상처를 터트리고 통증을 얻고 만다. 알바 문제로 엄마와 상의해야겠다는 민경 언니의 말에 소희는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상처를 터트린다. 어쩌면 소희는 ‘손톱’을 터트려 육체적 고통으로 ‘가족’이라는 정신적 고통을 덮어버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터진 상처는 통증을 유발시켰지만 소희에게 통증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S쇼핑테마파크 매장에서 받은 운동화를 중고 매매 사이트에 팔아 겨우 마련한 생활비에서 7만원이나 되는 냉동치료를 받는 것. 그것은 소희의 계산에서 어긋나는 일이며 사치였다. 한 번 어긋나기 시작한 계산은 소희의 생활패턴을 빠르게 무너뜨리기에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냉동치료를 받고난 뒤에 소희는 이상하게 가지지 못할 것들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이 닦인 유리 너머로 외제 자동차들(p.29)’을 구경하고, ‘가전제품과 옷장이 완벽하게 빌트인된 신축 빌라(p.30)’를 구경한다. 소희가 아무리 열심히 계산을 하고 저축해도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소희는 그저 구경할 뿐이었다. 오래전에 집을 나간 언니와 같이 살 거라며 중개사에게 거짓말을 치고 종국에 언니의 예전 휴대전화 번호를 불러주며 급히 자리를 뜬다. 소희의 이러한 행동은 소희가 늘 계산해오던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다. 언젠가 올 수도 있는, 올지도 모르는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무너진 ‘희망’을 복구시키고 싶었던 소희의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희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구경한 뒤에 마주한 것은 ‘소희 눈에 딱 봐도 가난하고 갈 곳 없는 할머니(p.33)’이었다. 소희가 꿈꾸는 미래와는 확실히 다른 아주 현실적인 미래. 그 미래는 ‘차와 커피를 공짜로 먹을 수 있는(p.32)’ 곳을 정보로 빠르게 습득하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소희는 ‘밥도 짓고 국도 끓여야 하는(p.35)’ 현실로 돌아가야 하지만 할머니에게 알 수 없는 따뜻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렇게 ‘조금만, 조금만,(p.35)’ 현실을 자꾸만 미룬다.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소희의 모습은 삼포세대를 넘어 오포세대를 살고 있는 청춘들을 닮았다. ‘1억에 30(p.31)’이나 되는 집값을 감당하지 못하고 대출금을 갚는데 허덕이는 소희는 웃을 수 없는 청춘의 자화상이었다. 안쓰럽고 불쌍하고 어떻게 보면 처절하기까지 하는 소희는 그렇게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계산하며 빚을 갚고 또 갚을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소희의 삶을 다 읽어 내리자 동정심만이 마음속에 덩그러니 남아있어 허무했다.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셔우드 앤더슨, <달걀> (0) | 2019.11.22 |
---|---|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0) | 2019.11.22 |
<장화홍련전> (0) | 2019.11.22 |
영화 <밀양>과 이청준 <벌레이야기> (0) | 2019.11.22 |
영화 <신과함께>와 웹툰 <신과함께> (0) | 2019.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