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
책2019. 11. 22. 18:52<장화홍련전>은 동화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 장씨를 잃고 계모 허씨에게 구박을 당하면서 죽임을 당하고 영웅 같은 부사가 이를 구원해주는 이야기 구성이 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은 동화의 구성과는 다르게 매우 잔혹하다. 계모 허씨가 장화를 처단하기 위해서 죽은 쥐를 튀겨서 피를 묻히고 낙태한 형상을 만들거나 장화를 연못으로 보낸 장쇠가 큰 범에 물려 한 팔과 한 다리와 두 귀를 잃거나 부사가 계모 허씨를 능지처참하는 벌을 주는 것이 동화 같은 구성에 비해 너무도 잔인했다. 그래서 <장화홍련전>을 다 읽고 나서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장화홍련전>은 뚜렷한 권선징악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 나쁜 계모 허씨는 잔인하고도 못된 심성이 밝혀져 능지처참의 벌을 받고 죽은 장화와 홍련은 배무룡의 새부인 윤씨에게 다시 태어나게 된다. 처음 <장화홍련전>의 도입부를 읽을 때부터 아주 보편적인 권선징악의 구조를 느꼈지만 이야기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래서 옛날사람들이 더욱더 소설에 열광했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장화홍련전>은 무능한 가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배무룡이 후사를 돌보기 위해서 부득이 계모 허씨에게 장가를 가지만 계모 허씨의 계략에 이리저리 휘둘려 장화홍련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장화홍련을 잃어버린 후 벌을 받아야하지만 장화홍련의 간곡한 부탁으로 벌을 피하게 되는데 이 또한 무능한 가장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오직 배무룡이 하는 일이라고는 후회하는 일밖에 없었다.
<장화홍련전>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다. 배무룡은 무능한 가장이었지만 가부장제에서는 강력한 ‘아비’였다. 외삼촌의 집에 가라는 말에 거역하려는 장화에게 배무룡은 말한다. ‘네 오라비 장쇠를 데리고 가라 하였거늘, 무슨 잔말이 하여 아비의 영을 거역하느냐?’, ‘너는 아비의 영을 순순히 따라야 되거늘, 무슨 말을 하여 부명을 어기느냐?’ 허울뿐인 아버지 배무룡이라도 가부장제에서의 아버지라면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경지에 오른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가장의 무능함은 더욱더 돋보인다. 그렇게 강력한 아버지임에도 계모 허씨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는 모습이 말이다. 그리고 계모 허씨는 아주 못된 계모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배무룡의 조강지처 장씨의 자식들 장화홍련이 있는 한 그 입지는 매우 불안정했다. 그리고 아들을 세 명이나 낳아도 조강지처의 재산 덕에 계모 허씨는 위태로운 첩의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본디 빈곤하게 지내왔으나 전처의 재물이 많으므로 지금 넉넉하게 사는 것이니, 그대의 먹는 것이 다 전처의 재물이라. 그 은혜를 생각하면 크게 감동할 바이거늘, 저여아들을 심히 괴롭게 하니 그 무슨 도리뇨?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 계모 허씨는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서 조강지처의 자식들인 장화홍련을 죽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정 내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배무룡을 거짓으로 홀려 장화홍련을 죽였다. 또한 여성의 정절에 대한 유교적인 사상이 드러난다. ‘과연 낙태를 하고 누웠다가 첩을 보고 미처 수습치 못하여 황망하기로 첩의 마음에 놀라움이 크나, 저와 나만 알고 있거니와 우리는 대대로 양반이라 이런 일이 누설되면 무슨 면목으로 세상을 살리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장화 때문에 양반 가문이 욕보이면 안 된다는 계모 허씨였다. ‘저 아이를 죽이지 아니하면 장차로 문호에 화를 면치 못하리니, 기세양난이나 빨리 처치하여 이 일이 탄로치 않게 하소서’ 그리고 정절을 지키지 못한 딸을 둔 양반 가문보다 죽은 딸이 있는 양반 가문이 낫다는 계모 허씨였다. 물론 계모 허씨가 장화를 죽이기 위한 계략이었지만 배무룡은 계모 허씨의 말을 결코 잘못되었다고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점에서 정절을 잃은 여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유교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었다.
<장화홍련전>은 기이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 ‘갑자기 물결이 하늘에 닿으며 찬바람이 일어나고 월광이 무색한데. 산중으로부터 큰 범이 내달이 꾸짖기를 「네 어미 무도하여 애매한 자식을 모해하여 죽이니 어찌 하늘이 무심하시랴!」 이에 달여들어 장쇠놈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떼어먹고 간데 없으니 …’ 말하는 호랑이가 나타나 계모 허씨의 아들 장쇠를 물거나 ‘하루는 청조 한 마리가 날아와서, 온갖 꽃이 만발한 사이로 오락가락하기에 … 문득 청조가 날아와 나무에 앉으며 홍련을 보고 반기는 듯 지저귀므로 … 청조는 고개를 조아리며 응하는 듯 …’ 청조가 장화를 잃고 슬퍼하는 홍련을 위로하다가 죽은 장화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거나 ‘홍련이 좌우를 살펴보니, 물 위에 오색 구름이 자욱한 곳에서 슬픈 울음소리가 나며 홍련을 불러 이르는 말이 …’, ‘밤이 깊은 후에 홀연히 찬바람이 일며 정신이 아득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난데없는 한 미인이 녹외홍상으로 완연히 들어와 절을 하므로 …’ 죽은 이들이 귀신으로 산 사람 앞에 나타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이러한 기이한 일이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악인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어버린 선인을 구제하기 위한 극적인 설정이다. 즉, 권선징악이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일종의 소설 장치이다.
<장화홍련전>을 읽으면서 불편했던 점이 있었다. 왜 꼭 못된 사람들은 얼굴이 못생기고 흉악하게 생겨야하는지 말이다. 계모 허씨만 해도 그렇다. <장화홍련전> 소설에서 계모 허씨를 비유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사람이 아닌 괴물을 형상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용모를 말할진대, 두 볼은 한 자가 넘고 눈은 퉁방울 같고 코는 질병 같고 입은 메기 같고 머리털은 돼지털 같고 키는 장승만하고 소리는 이리소리 같고 허리는 두 아름이나 되는 것이, 곧 배팔이요 수종다리에 쌍언청이를 겸하였고, 그 주둥이를 썰어내면 열 사발은 되겠고 얽기는 콩멍석 같으니, 그 생김새는 차마 바로 보기가 어려운 중에 …’ 극적인 구성을 위해서 외모를 못생기게 설정해놓았다고 해도 착하면서 예쁜 장화홍련과는 너무도 대조되었다. ‘장화 홍련의 형제는 점점 자라매 얼굴이 화려하고…’ 어떻게 보면 ‘못생긴 사람은 성격도 못되다.’ 라는 일종의 공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장화를 쫓아내기 위한 계략으로 낙태를 그 이유로 들었을 때 옛날에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성에 대한 시선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무리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해도 딸의 잃어버린 정절은 용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 배무룡은 아내 장씨를 잃고 난 뒤에 두 번이나 더 장가를 간다. 여성에게 정절을 강요하면서 남자 인물에게는 여러 번의 재혼에도 어떠한 제약이 없었다는 점이 모순되게 느껴졌다. 또한 장화홍련을 제외한 여성 인물들이 배무룡을 위해서 아이를 낳아주는 역할에 한정되어있다. 장화홍련을 낳아준 장씨, 배무룡의 아들을 낳아준 계모 허씨, 배무룡의 잃어버린 장화홍련을 낳아준 윤씨, 우여곡절 다시 태어난 장화홍련도 훌륭한 남편을 만나서 아이를 낳는 모습에서 유교문화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여성 인물로 그 한계점을 보았다.
이처럼 <장화홍련전>을 분석적으로 읽고 난 뒤에 든 생각은 아주 보편적인 권선징악의 주제라도 그 당시 시대적 배경을 잘 소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부장제, 조강지처, 정절이 악인 계모와 선인 장화홍련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가려진 배무룡은 악인도 선인도 아닌 모호한 자리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 <장화홍련전>의 한계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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