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밀양>과 이청준 <벌레이야기>

2019. 11. 22. 18:50

이창동의 <밀양>은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모티프로 각색된 영화이다. 소설에서 영화로 재탄생하면서 가장 큰 축이었던 인물이 조금씩 바뀌게 되는데 우선 소설에서는 아내, 알암이, 남편인 나, 김 집사를 중점으로 흘러가지만 영화에서는 피아노 학원 강사인 이신애, , 카센터 사장인 김종찬, 범인인 박도섭, 약사인 김 집사를 중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에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남편인 나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아내를 지켜보는 입장이 되지만 영화에서는 이신애의 시선으로 치근덕거리는 김종찬을 귀찮아하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기독교를 강요하는 김 집사에게 시큰둥하며 잃어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결국 미쳐버리는 모습을 오롯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영화의 카메라 기술은 소설에서 심층적으로 보여주지 못했던 아내의 속마음을 이신애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준이 인위적으로 코를 골고 이유 없이 울고 떼를 쓴다거나 지나치게 말이 없는 모습들이 관객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다가올 때 이에 대한 설명을 이신애의 대사를 통해서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대략 유추할 수 있었지만 소설에서는 알암이의 내성적인 성격을 그저 알 수 없음으로 치부해버리고 말아버렸다. 또한 소설에서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아내를 관찰하며 어떠한 행동으로도 아내에게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남편을 잃고 밀양으로 내려온 이신애에게 반해서 일부러 이신애의 주위를 돌며 잘해주는 김종찬이었다. 소설에서는 이미 고정된 아내와 남편이라는 부부의 관계성에 두 인물간의 새로운 갈등이나 사건이 없었지만 영화에서는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이신애와 연인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김종찬의 흑심과 미쳐가는 이신애를 붙잡고 싶어 하는 김종찬을 바라보면서 관객들은 인물간의 새로운 사건과 갈등에 주목한다. 또 소설에서는 범인 김도섭은 반전을 준비하기 위한 밑거름일 뿐 아내와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신애가 범인 박도섭과 범인 박도섭의 딸과 마주하면서 어느 정도의 접점이 발생하여 관계를 맺고 있다. 이신애가 운전을 하면서 지나가다가 박도섭의 딸이 한 남자에게 맞고 있는 걸 목격하는 장면, 이신애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들렀다가 그 미용실의 미용사가 박도섭의 딸인 장면은 이신애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이 접점이 발생하여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스스로 삼켜내다가 결국 약을 먹고 자살해버리는 자기파멸에 이르지만 영화에서는 누가 이기나 보자!’ 싶은 마음으로 약사 김 집사의 남편과 대낮에 성관계를 맺으면서 하늘에 대고 원망을 뇌까리고, 김 집사의 집으로 찾아가 창문에 돌멩이를 던져버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이처럼 소설과 영화의 자기파멸이 조금씩 다른 방식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 <밀양>밀양이라는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전개된다. 그래서 영화 첫 장면 역시 왜 이신애가 밀양으로 내려오게 되었는가에 주목한다. 영화 촬영지 역시 밀양이다. 영화 <밀양>이 개봉되고 난 이후에도 실제 영화 촬영지였던 밀양 곳곳에 전도연 거리라는 명칭까지 생길 정도였다. 영화에서 배경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소설은 배경보다 사건에 중점을 둔다. 소설의 특징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개연성이 바로 사건과 연계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벌레이야기>에서는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지식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알암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아내의 행동에 주목한다. 소설은 영화의 영상미를 비유로 대신한다. 소설에서 알암이를 찾기 위한 아내의 노력은 집념과 초인적이라는 단어로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준을 찾기 위한 이신애의 노력은 숨이 넘어가는 호흡, 얼굴을 뒤덮은 눈물과 같은 영상으로 그려진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모습이 가장 사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영화의 영상미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만큼 가장 사실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의 비유가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길게 서술되는 아내의 행동들이 얼마나 아이를 찾고 싶어 하는지 느낄 수 있다.

소설 <벌레이야기>에서는 알암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최후의 모습을 비유하여 보여준다. 아이의 육신은 이미 부패가 심하여 형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 손발이 뒤로 묶인 채 입에는 수건까지 물려 암매장 당해 있는 몰골이 유괴 피살을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또한 아이가 죽은 장소까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 건물 일대는 새해 들어서부터 도시 재개발 사업이 시작된 곳이었다. 범죄 현장이랄 수 있는 2층 건물은 4월 말쯤(나중 조사에서 확인된 일이지만 그것은 알암이의 실종직전이었다)에 이미 사람이 나간 곳이었다.’ 독자들이 범인을 추적할 수 있도록 그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영화 <밀양>에서는 실종된 준의 시체도, 준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범인 박도섭의 정체만 보여주면서 이신애가 미칠 수밖에 없었던 잔혹한 이유만 알려줄 뿐이었다. 영상미라는 영화의 특성상 보이는 것이 많은 것에 비해 사건의 정보가 없다는 것이 참 의아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것은 결국 관객의 상상에 맡길 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영화의 전개방식을 불친절하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영화가 실질적으로 주목하는 것이 준의 실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작인 소설의 한 구절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이야기 초반 내내 알암이의 실종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남편은 이를 그만두고 만다. 하지만 이제 사건의 시말은 이쯤에서 그만 이야기를 마무려두는 것이 좋으리라. 이 이야기는 애초 아이가 희생된 무참스런 사건의 전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어느 무디고 잔인스런 아비가 그 자식의 애처로운 희생을 이런 식으로 머리에 되떠올리고 싶어 하겠는가. 그것은 내게서 아이가 또 한번 죽어나가는 아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알암이에 뒤이은 또 다른 희생자 아내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때문이다.’ 바로 아내의 이야기가 주목해야했던 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원작 소설의 강력한 주장 탓인지 영화에서는 준의 실종에 대하여 불친절할 정도로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점점 기독교에 기대다가 하나님에 대한 원망감에 미쳐버리는 이신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물음표로 던질 뿐이었다. 이러한 영화의 전개방식은 감독이 자신의 메시지에 주목하기를 바라고 찍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역효과를 줄 수도 있다. 바로 준이의 행방에 대하여 관객들의 호기심을 증폭시켜 감독의 메시지를 미스터리로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끝내 영화를 다 보고난 이후에도 도대체 이 영화의 내용은 무엇인가? 라고 의문점만 남기는 관객들처럼 말이다.

영화 마지막 결말에 카메라가 햇볕을 비추면서 엔딩 크레딧을 올려버리는데 햇볕에 대한 해석을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햇볕에 대한 언급은 영화 중간 중간 여러 번 등장하는데 우선 그 첫 번째는 이신애가 처음 밀양에 도착하여 김종찬에게 밀양의 뜻을 알려줄 때였다. 이신애는 밀양의 뜻을 한자로 비밀 밀()에 볕 양()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영어 제목 역시 ‘Secret Sunshine’ 인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런 것이 아닐까? 또한 김 집사는 이신애를 설득시키기 위해 약방의 바닥 한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땅바닥에 있는 햇볕 한 조각에도 주님의 뜻이 숨어있다고. 이에 대하여 이신애는 소리 지르며 받아친다. 이건 그냥 햇볕일 뿐이라고 아무것도 없는 햇볕일 뿐이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의 은유로 감독이 햇볕을 그 의미로 쓴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소설의 결말은 범인 김도섭이 교수형 집행으로 그 소식이 라디오에까지 방송된다. 범인 김도섭이 남기고 간 몇 마디는 아내의 자살을 자극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주실 것이다,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구원이 함께 임해지길 바란다.’와 같은 오지랖으로 아내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고 끝내 견디지 못하여 약을 마셔버린다. 영화와는 다르게 소설에서는 숨겨진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범인 김도섭에 대한 분노로 똘똘 뭉쳐 자기파멸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아내는 보이지 않는 믿음에 계속 원망하고 분노하고 복수심을 가지지만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음에 무력감을 느끼고 만다. 이를 아주 극명하게 표현한 결말이 자살이 아니었을까. 화는 마음속에서 돌고 도는데 범인은 도리어 용서를 받아들이라는 군자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그 화를 삼킬 수가 있을까. 영화에서는 정신이 이상해져 정신병원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점차 치유하는 긍정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소설에서는 가장 씁쓸한 방식으로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 <벌레이야기>라는 제목 그대로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과 같이 추악하고 찝찝한 결말이었다.

영화 <밀양>은 영상미라는 영화의 특성을 이용하여 은유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에 대하여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관객에게 맡기면서 고민하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반면 소설 <벌레이야기>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 믿음, 믿음에 대한 배반이라는 아주 명확한 비유들이 즐비하여 결말을 향해 달려갈수록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독자들은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듯 범인의 마지막 몇 마디도 추악하기 그지없음을 느낀다. 영화 <밀양>에서 이신애가 죽지 않고 계속 삶을 이어가면서 극복할 수 있다는 어떠한 긍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햇볕을 비춘 것에 대하여 희망을 갖지만 소설 <벌레이야기>에서는 아내가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해버리는 끝을 맞이하면서 그 어떠한 희망도, 긍정도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다른 점이었다.

또한 영화 <밀양>은 김종찬과 이신애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이신애가 준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닐까. 김종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신애를 위해서 헌신한다. 이신애를 위해서 피아노 학원에 상장을 달아주고, 이신애를 위해서 집을 알아봐주며 이신애를 위해서 믿지도 않는 종교를 믿고 거리에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찬송가를 부른다. 결말 부분에서까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신애를 위해 거울을 들어준다. 끝까지 옆에 있어주며 이신애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 그 이상으로 믿음을 얻게 만든 것이 아닐까. 반면 소설 <벌레이야기>에서는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관찰적인 의 시점이 냉소적으로 느껴진다. 아이를 잃은 두 사람의 반응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를 찾기 위해서 무엇이든 행동하는 아내에 비하여 그런 아내를 멀리서 지켜보기 만하는 남편은 방관에 가까울 정도로 무정하다. 안타까워하는 시선에 비해 행동은 너무도 무정하다. 결말에서 아내가 자살을 하였을 때도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뉴스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났다. 물론 문자로 이루어진 소설의 특성상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남편의 무정함이 이토록 선명한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소설 <벌레이야기>와 영화 <밀양>의 결말이 달라지는 것을 인물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볼 수 있었다. 영화에서는 이신애에게 헌신적인 김종찬의 모습과 소설에서는 아내에게 무정한 남편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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